Jecheon Chronicle · 내토에서 제천까지

제천의 역사,
둑의 이름에서 호반의 도시까지

제천은 한 고을의 이름이 아니라, 오래도록 나란히 살았던 제천과 청풍이 한 몸으로 겹친 자리다. 지명은 둑에서 왔고, 물길은 남한강으로 모였으며, 산은 삼국의 접경이 되었고, 근대에는 철도가, 그다음에는 호수가 이 땅의 모습을 바꿨다.

읽는 법. 제천시가 펴낸 『시정백서』(2000~2003, 2013·2018·2024년을 chronicle에서 인용)와 『제천시지』(2004)의 원문 PDF는 시 내부 발간물로, 웹에 통째로 열려 있지 않다. 아래 글은 그 백서·시지가 근거로 삼는 같은 계통의 공개 자료, 곧 제천시 공식 연혁, 『디지털제천문화대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의림지역사박물관, 제천 의병전시관 설명을 대조해 다시 썼다. 전설과 확정 사료는 구분해 적었다.

1. 이름, 내토와 제천

제천시청 앞길이 내토로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고구려 때의 지명은 내토(奈吐) 또는 나토(奈吐·奈吐)로 전한다. 신라 경덕왕 16년(757)에는 내제(奈堤·柰堤) 또는 나제(奈隄)로 고쳤다. 둑을 뜻하는 말들이 지명에 남았다. 의림지역사박물관은 제천의 옛 이름 내토·내제가 모두 큰 둑에서 왔다고 본다. 충청·경기를 묶어 부르던 호서(湖西)의 ‘호’ 역시 의림지를 가리킨다는 설명이 같은 자리에 있다.

고려에 들어와 이름은 제주(堤州)가 되었다. 제(堤)는 여전히 둑이다. 조선 태종 13년(1413)에 비로소 제천(堤川)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디지털제천문화대전』은 이 개명을 조선 지명 정리의 한 장면으로 적는다. 제천시 공식 연혁도 신라 내제군, 고려 제주, 조선 제천현과 청풍군, 1980년 시 승격, 1995년 시군 통합의 다섯 단으로 같은 줄기를 요약한다.

다만 제천만의 역사로 읽으면 절반이 빠진다. 오늘날 시역의 남쪽, 남한강이 크게 굽던 자리는 오래도록 청풍이었다. 사열이현에서 청풍현·청풍군·청풍도호부로 이어진 고을은 1914년에야 제천군에 합쳐졌다. 제천과 청풍은 주현과 영현으로 얽히기도 하고, 원주와 충주로 갈라 속하기도 하면서 천 년 가까이 나란히 살았다. 이 글을 길게 쓰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2. 점말동굴과 선사

사람이 이 골짜기에 산 흔적은 행정 지명보다 훨씬 앞선다. 송학면 포전리 점말의 용굴은 남한에서 처음 확인된 구석기 동굴 유적으로 꼽힌다. 1973년부터 1980년까지 연세대학교 박물관이 여러 차례 파냈다. 동굴은 용두산 동남 사면, 병풍바위 아래 석회암 줄기에 동남향으로 열려 있다. 햇볕이 들고 바람이 덜한 자리였다.

층위는 전기·중기·후기 구석기를 가로지른다. 중기층은 우라늄 계열 연대로 대략 6만 6천 년 전후, 후기층은 탄소 연대로 1만 3천~1만 8천 년 전후로 읽힌다. 털코뿔이, 동굴곰, 짧은꼬리원숭이 같은 짐승 뼈와 석기, 뼈연모, 불 땐 자리가 나왔다. 중기층 짐승뼈에는 얼굴을 새기려 한 자국이 있어, 예술 행위의 흔적으로 논의되기도 했다. 후기층에서는 사람의 손뼈·발뼈가 확인되었다. 같은 동굴에서 신라·고려 유물과 화랑으로 추정되는 암각도 나와, 선사와 역사가 한 굴에 겹쳐 있다.

신석기·청동기 자리는 남한강변에 더 촘촘하다. 청풍면 양평리·황석리·진목리·방흥리, 한수면 사기리, 금성면 월굴리, 백운면 도곡리, 수산면 하천리 등에서 토기와 고인돌이 조사되었다. 그 상당수는 뒤에 충주댐 물에 잠겼다. 선사의 중심지가 바로 후대의 수몰지였다는 사실은, 제천 역사를 강과 떼어 읽기 어렵게 만든다.

3. 삼국에서 내제군까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삼한 때 이 일대를 마한에 속한 것으로 보고, 4세기경 백제의 땅이 되었다가 뒤에 고구려에 들어가 나토군이라 불렸다고 정리한다. 청풍 쪽은 사열이현(沙熱伊縣)이었다. 5세기 말엽에는 신라 영토로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가야금을 만든 우륵이 이곳에서 났다는 전승이 있으나, 출생지를 확정하는 당대 기록은 따로 없다.

접경이라는 위치가 삼국의 이해를 겹치게 했다. 주변의 철과 남한강 물길을 누가 쥐느냐가 관건이었다. 금성면 성산성, 포전리 작성산성, 청풍 망월산성, 봉양 감암산성, 한수면 덕주산성, 수산면 오치봉수 같은 관방 유적이 그 긴장을 지금껏 보여 준다. 문무왕 13년(673)에는 청풍 쪽 사열산성을 증축했다는 기록이 있다.

경덕왕 16년(757) 한화 정책으로 나토는 내제군(또는 나제군)이 되고, 사열이현은 청풍으로 이름이 바뀌어 내제군의 속현이 되었다. 삭주 북원경(지금의 원주)에 소속되었다. 백운면 부수동에는 신라 경순왕의 이궁이 있었다는 전승이 남아 있다. 통일 신라의 지방 제도 안에서 제천·청풍은 이미 ‘둑의 고을’과 ‘맑은 바람의 고을’로 나뉘어 있었다.

4. 고려의 제주와 청풍

고려 태조 23년(940) 무렵 내제는 제주(堤州)가 된다. 성종 11년(992)에는 의천(義泉) 또는 의원(義原)이라는 별호를 받았다. 995년 중원도에 속해 자사를 두었다가, 목종 8년(1005)에 그 직을 없앴다. 현종 9년(1018) 대대적인 지방 제도 개편 때 제주는 원주목에, 청풍은 충주목에 갈라 붙었다. 제천시 공식 연혁이 “현종 9년에 제주군과 청풍현으로 개편”이라고 한 대목이 이 장면이다.

감무를 본격적으로 둔 것은 12세기 이후, 예종 원년(1106) 전후로 본다. 그 전까지는 향리가 충주목사나 지원주군사의 통제 아래 조세와 부역, 소송을 맡았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적힌 토성 집단이 그 실질 운영자였다. 충숙왕 때 청풍 출신 승려 청공이 왕사가 되자 청풍현은 군으로 올랐다. 작은 고을이 인물 한 사람으로 격을 바꾸는 일은, 뒤에 조선의 청풍도호부에서도 다시 일어난다.

외세도 이 재를 넘었다. 고종 4년(1217) 거란 군이 박달재를 공격했을 때 김취려가 정상을 먼저 점하고 섬멸했다는 기록이 있다. 1258년 몽골군이 들어왔을 때는 충주·제주·청풍의 별초군이 박달재에 복병을 두어 막았다. 고려 후기에는 왜구의 수난도 있었다. 중앙에서 멀다고 전쟁이 비껴가진 않았다. 오히려 원주와 충주, 영월로 가는 길목이라 더 자주 스쳤다. 조선 태조 4년(1395) 제주는 충청도로 옮겨진다. 오늘날 제천이 충북에 속하게 된 행정상의 출발은 이 무렵이다.

5. 조선, 두 고을의 시간

태종 13년(1413) 제주가 제천으로 바뀌고 현감이 파견되었다. 제천현과 청풍군은 충청도의 50여 고을 가운데 나란히 들어갔고, 단양·영춘과 함께 사군 또는 내사군으로 불렸다. 중앙에서 보면 변방이었으나, 신라 5소경 중 북원경과 중원경에 이웃해 있어 학문과 제도가 드나들 통로는 있었다.

세조가 왕위를 차지한 뒤 단종이 영월 청령포에 유폐되자, 원호는 월악산 기슭에 귀틀집을 짓고 아침저녁으로 청령포를 향해 절했다. 송학면 장곡리의 원호 유허비와 관란정이 그 자리를 가리킨다. 충절의 이야기가 영월만의 것은 아니었다. 제천 쪽에서 강을 건너 바라보는 일이기도 했다.

현종 즉위년(1660) 청풍은 도호부로 승격한다. 현종비 명성왕후 김씨의 관향이라는 이유였다. 제천현보다 작은 고을이 밀양·남원과 같은 격이 되었고, 충청도에서 유일한 도호부가 되었다. 명사들이 부사로 오고 싶어 하는 고을이 되면서 시와 학이 따라왔다. 권상하 문하의 인물성동이논쟁, 시인 권섭의 출현을 『디지털제천문화대전』은 그 바탕 위에서 읽는다.

재지 사족은 동성 마을과 서원으로 스스로를 공인했다. 청풍 김씨는 김식·김육을 배향한 봉강서원, 안동 권씨는 권상하를 배향한 황강서원, 진주 강씨는 남당서원, 의흥 박씨는 임호사를 내세웠다. 영일 정씨는 정익하의 불천위를 모셨다. 1889년 유중교가 봉양 공전리에 세운 자양영당은 화서학파의 강학 공간이 되었고, 얼마 뒤 제천 의병의 정신적 근거지가 된다. 제천향교는 1389년 창건, 1590년 교동으로 옮긴 뒤 오늘에 이른다. 청풍향교는 충주댐 때 물태리로 이전·복원되었다.

고종 32년(1895) 제천현은 제천군이 되고, 청풍도호부는 청풍군으로 되돌아간다. 이듬해 충청북도 소속이 확정된다. 갑오·을미의 제도 개편은 지명만 바꾼 것이 아니었다. 단발령과 명성황후 시해가 바로 이 고을에서 의병으로 번지는 입구가 된다.

6. 의림지가 말해 주는 것

의림지는 제천을 설명하는 가장 오래된 시설이다. 삼한 축조라는 전승이 오래 돌았고,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가 제방 남쪽 하단부를 파낸 뒤에는 적어도 삼국시대에 만들었을 가능성이 확인되었다. 제방은 점토와 나뭇잎, 풀을 번갈아 쌓아 물을 막았다. 1914~1918년 수문을 고쳤고, 1972년 장마에 일부가 무너진 뒤 다시 쌓아 지금 모습에 가깝다.

『세종실록지리지』는 의림지가 제천 경작지의 70퍼센트 이상을 적셨다고 적는다. 당시 농업 선진지로 불리던 경상도의 관개율이 17퍼센트 안팎이었다는 점과 견주면, 경지 면적은 좁아도 물 다루는 기술은 앞서 있었다. 산간 분지에서 벼농사가 가능하다는 사실이 고을의 격을 받쳐 주었다. 의림지역사박물관은 관개 면적이 담수 면적의 열세 배에 이른다고 설명한다. 저수지는 지금도 농지에 물을 대면서, 제림과 영호정·경호루와 함께 도심의 경관이 되어 있다. 2006년 12월 4일 「제천 의림지와 제림」이 명승으로 지정되었다.

박달재 전설, 오누이바위, 금수산의 주천자 무덤 이야기, 높다리 전설은 지명에 붙은 입말이다. 사료와 같은 층에 올려놓기는 어렵다. 다만 고개가 사람과 소식을 가로막던 땅이었다는 감각만큼은, 전설이 행정 연혁보다 먼저 전한다.

7. 배론, 박해와 신학교

봉양읍 구학리 배론은 조선 후기 천주교의 숨은 자리였다. 순조 1년(1801) 신유박해 때 황사영은 이곳 토굴에 숨어, 흰 명주천에 조선 교회의 사정을 적어 베이징 주교에게 전하려다 붙잡혔다. 이른바 황사영 백서 사건이다. 제천의 ‘백서’라는 말이 행정 백서보다 먼저 가리키던 것은, 역설적이게도 이 밀서였다.

철종 7년(1856) 배론에 신학교가 섰다. 경신박해(1860) 뒤 피신한 신자가 늘자 생계를 위해 옹기를 굽기 시작했다. 봉양·백운·송학·청풍의 옹기 전통을 그 연장에서 읽는 기록이 있다. 고종 3년(1866) 병인박해로 프랑스 신부와 수많은 신자가 목숨을 잃으면서 신학교는 문을 닫았고, 터만 남았다. 개항기 제천은 산간 고을이면서 동시에, 세계 종교와 조선 왕조의 충돌이 직접 닿은 현장이었다.

8. 호좌의진, 제천 의병

1889년 이래 장담(봉양읍 공전리)에는 유중교의 강학이 이어졌고, 사후에는 유인석을 중심으로 척사의 공기가 짙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이 떨어지자 장담의 선비들은 거의, 망명, 자결을 놓고 밤을 새웠다. 이듬해 1월 지평의 포군이 제천으로 들어오고, 장담 선비들이 합류했다. 이필희를 대장으로 한 의진이 단양 장회에서 첫 승리를 거두었다. 군수 김익진은 단발을 강요하다 달아났다는 기록이 있다.

지휘가 흔들리자 의진은 영월에서 유인석을 대장으로 추대했다. 을미년 12월 20일, 양력 1896년 2월 7일이었다. 호좌의진, 곧 제천 의병이다. 중군장 이춘영, 전군장 안승우, 선봉장 김백선, 소모장 서상렬 등이 부서를 맡았다. 의진은 제천 관아를 접수하고 아사봉에 본영을 두었다. 단양·청풍 군수를 처단하고 충주성을 점령했으며, 영남으로는 서상렬이 일곱 고을을 묶었다. 한때 충주부를 중심으로 중부 내륙의 해방구에 가까운 세력권이 열렸다.

오래가지 못했다. 일본군과 관군의 공세, 수안보·가흥 병참 기지 공격의 반복 끝에 5월 제천 남산 전투에서 패했다. 안승우는 그 자리에서 죽었다. 유인석은 서행하다 압록강을 건너 의진을 해산했다. 나라 밖 항일 기지를 모색한 길은, 뒤에 독립운동 기지 건설 노선의 한 출발로 읽힌다.

을사년 이후 원용팔·정운경이 다시 일어났고, 1907년 군대 해산 뒤에는 해산 군인과 옛 의병론자가 섞여 제천 천남에서 일본군과 대규모로 붙었다. 이강년은 호좌의진을 재건해 충청·강원·경상·경기 산악을 유격전으로 누볐고, 13도 창의군의 서울 진공 때 양주까지 나갔다. 1908년 7월 2일 청풍 금수산에서 체포되면서 의진은 무너져 갔다. 김상태가 잔여 병력을 이끌다 1911년 9월 21일 옥사했다. 을미에서 정미까지, 제천은 의병의 시작이자 끝 가까운 자리였다. 고암동 애국열사 묘역이 그 이름을 모아 두고 있다.

9. 1914년 통합과 철도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의 부군면 통폐합으로 청풍군 일원과 충주군 덕산면의 여러 리가 제천군에 들어왔다. 읍내면·백운면·성산면·송학면·비봉면·수산면·금수면·한수면·덕산면·수하면 등 열 개 면의 뼈대가 이때 잡혔다. 1917년 금수면과 성산면을 합쳐 금성면, 읍내면을 제천면, 비봉면을 청풍면으로 고쳤다. 1920년 근우면과 근좌면을 합쳐 봉양면이 되었다. 1929년 수하면을 없애고 한수면으로 재편했다. 두 고을이 비로소 한 군이 된 것은 의병의 기억보다 스무 해도 채 지나지 않은 때였다. 철도가 제천을 교통 요지로 만들면서 청풍이 제천에 흡수되었다는 설명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있다.

1940년 제천면은 제천읍이 된다. 『디지털제천문화대전』은 4월, 위키백과 연혁은 11월 1일로 적는다. 월은 자료마다 갈리지만 그해 읍 승격 자체는 시 공식 연혁과 일치한다. 왜식 정(町) 지명이 잠시 붙었다가, 1946년 명동·서부동·의림동·교동·동현동·중앙로로 되돌려졌다.

1919년 이범우를 중심으로 만세 운동이 일었다. 제천 출신 황학수는 광복군 지휘관으로 이름을 남겼다. 동시에 제천은 일제의 자원 수탈과 대륙 침략을 위한 배후 도시이기도 했다. 중앙선이 남북을 가르고, 태백선이 석탄과 시멘트를 실어 나르고, 충북선이 호서와 이었다. 물류의 심장처럼 보이는 교차점은, 식민지 수탈의 교차점이기도 했다.

10. 해방, 전쟁, 철도 도시

해방 직후 산간에는 빨치산이 드나들었고, 한국전쟁 때는 전선이 여러 번 이 분지를 스쳤다. 피난 보따리를 싸야 했던 기억이 시지 근현대 편에 반복된다. 전후 제천은 중앙선·충북선·태백선이 만나는 내륙 철도 도시로 다시 선다. 태백의 석탄과 시멘트, 임산물이 여기를 거쳐 서울과 남쪽으로 빠졌다. 유동 인구가 늘고 시장이 커졌다. 읍의 인구와 시가지가 팽창한 배경이 그것이다.

근대 학교도 이 무렵의 연속에 있다. 1905년 한수면 찬명학교, 1908년 명동의 측량학교(동명초등학교의 전신), 백운면 흥명학교가 신교육의 시작으로 꼽힌다. 1942년 제천공립실과여학교, 1943년 제천공립농업학교, 1946년 제천공립초급중학교가 오늘의 여고·제일고·제천고로 이어진다. 사람이 모이는 철도역 앞에 학교와 시장이 붙는 전형적인 내륙 도시 성장이었다.

11. 시 승격과 충주댐

1980년 4월 1일, 법률 제3188호로 제천읍이 제천시가 되고 남은 제천군은 제원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같은 생활권이 시와 군으로 쪼개진 셈이다. 1983년 2월 금성면 강제리·명지리·산곡리와 봉양면 신리·천남리·왕암리가 시에 편입되었다. 1987년 한수면 여섯 개 리는 중원군 동량면으로 넘어갔고, 1989년 중원군 산척면 원월리가 백운면에, 금성면 대랑리가 제천시에 들어왔다. 시의 가장자리는 계속 움직였다.

더 크게 움직인 것은 물이었다. 1985년 충주다목적댐이 담수를 시작하면서 청풍·한수·수산·금성 등 다섯 개 면에 걸쳐 예순한 개 마을이 잠겼다. 청풍 읍내의 한벽루·팔영루·금병헌·금남루와 향교, 고가들이 물태리 언덕으로 옮겨져 청풍문화재단지가 되었다. 보물과 도 지정 유산, 비지정 가옥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보존이면서 동시에, 고을이 통째로 주소를 잃은 기록이다. 한수면은 마을 열에 여덟이 수몰되어 송계리로 면 소재지를 옮겼다. 경지는 줄고 밭이 논보다 많아졌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밭이 우세한 이유로 이 수몰을 든다.

같은 1980년대, 태백 석탄이 사양길로 접어들며 철도 물류의 배후지라는 강점도 옅어졌다. 시로 올랐으나 농촌은 제원군으로 떨어지고, 강촌은 호수가 되고, 탄광 도시와의 연결은 가늘어졌다. 『디지털제천문화대전』이 1980년대 이후를 침체의 위기로 적은 까닭이다. 월악산은 1984년 국립공원이 되어 다른 종류의 방문객을 부르기 시작했다. 수몰이 만든 호수가 나중에 청풍호라는 관광 자원이 되는 전도는, 그 당시에는 위로가 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12. 1995년 이후의 제천

1991년 1월 1일 제원군은 이름을 제천군으로 되돌렸다. 통합은 그해가 아니다. 1995년 1월 1일 도농복합 제천시가 출범하면서 시와 군이 한 몸이 되었다. 3월 2일 봉양면이 읍이 되어 1읍 7면 13동이 되었고, 1998년 동 통폐합으로 9개 행정동이 되었다. 2002년 고암동·모산동 신설과 동명 변경이 있었다. 제천시지는 제천과 제원이 본래 한 생활권이라 통합이 자연스러웠다고 적는다. 1980년의 분리가 인위적이었던 만큼, 1995년은 행정이 생활에 다시 맞춘 해에 가깝다.

세명대학교(1990)와 대원대학교의 전신이 들어서며 젊은 인구의 출입구가 생겼다. 제천지방산업단지(바이오밸리)는 1994년 지정, 2004년 준공으로 한방·바이오를 내세운 제조 기반이 되었다. 고암·강저 테크노빌과 송학의 시멘트, 약초 시장은 산지 도시의 다른 얼굴이다. 제천 의병제, 옥소 예술제, 제천국제음악영화제, 한방바이오박람회는 정체성을 바깥에 내보이는 장치가 되었다.

교통의 뼈대는 철도에서 도로로 두께가 옮겨 갔다. 중앙고속도로가 시가지 옆을 지나고, 국도 5·36·38호선이 교차한다. 동서 고속도의 개통과 KTX 제천역은 서울까지의 시간을 크게 줄였다. 철도가 만든 도시가 도로와 고속으로 다시 열리는 과정이다. 인구는 2010년대 들어 감소세가 뚜렷하다. 2015년 백과 항목의 13만 6천여 명에서, 2020년대 후반 시 소개 자료는 12만 명대 후반을 적는다. 면적 883제곱킬로미터 안팎, 임야가 70퍼센트를 넘는 산지 도시라는 조건은 조선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달라진 것은 물이 호수가 되었고, 둑의 고을이 호반의 도시로 불리게 되었다는 점이다.

제천시 공식 소개는 지금을 세 도 접경의 물류 요충, 월악·소백·치악 사이의 관광 휴양, 한방 천연물 특화 도시로 적는다. 그 문장의 아래에는 점말의 뼈, 의림지의 제방, 장담의 강학, 청풍 읍내의 수몰, 철도 교차의 흥망이 겹쳐 있다. 이름은 둑에서 왔고, 도시는 물과 길 때문에 거듭 다시 만들어졌다.

연혁 한눈에

시기내용
구석기송학면 점말동굴. 남한 최초 구석기 동굴 유적으로 조사됨.
고구려내토(나토)군. 청풍은 사열이현.
757경덕왕 16년, 내제군(나제군). 청풍이 속현.
940고려, 제주.
992별호 의천·의원.
1018현종 9년, 제주(원주)와 청풍(충주)으로 갈라 예속.
1106양광도, 감무.
1317청공 왕사. 청풍현이 군으로 승격.
1395충청도로 이속.
1413태종 13년, 제천으로 개명. 현감.
1660청풍도호부 승격(명성왕후 관향).
1801배론, 황사영 백서.
1856배론 신학교.
1895제천군·청풍군. 을미 의병의 입구.
1896. 2.유인석 호좌의진(제천 의병).
1908이강년, 금수산에서 체포.
1914. 4. 1.청풍군·덕산면이 제천군에 병합.
1940제천면 → 제천읍.
1980. 4. 1.제천시 승격. 잔여 군은 제원군.
1985충주댐. 5개 면 61개 마을 수몰.
1991. 1. 1.제원군 → 제천군 명칭 환원.
1995. 1. 1.시·군 통합, 도농복합 제천시. 3월 봉양읍.

1991년을 시·군 통합으로 적은 자료가 더러 있다. 『디지털제천문화대전』 개관 항목의 한 문장이 그렇다. 법률상 통합은 1995년 1월 1일이고, 1991년은 제원군 명칭을 제천군으로 되돌린 해다. 이 글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와 위키백과가 인용한 행정 연혁을 따른다.

참고한 자료

제천시, 「일반현황·지역의 유래」(jecheon.go.kr). 제천시, 『시정백서』 2000~2003(2004 간행) 및 이후 시정백서(2013·2018·2024, 시지·chronicle에서 인용. 웹 전문은 미공개). 제천시지편찬위원회, 『제천시지』(2004). 구완회, 「역사」, 『디지털제천문화대전』. 예경희, 「제천시」, 같은 대전. 예경희·한정수, 「제천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1995 집필, 2024 수정). 제천시 의림지역사박물관, 「제천 의림지와 제림」. 제천시 의병전시관, 「제천 의병사」. 구완회, 「의병 운동」「호좌의진」, 『디지털제천문화대전』.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제천의병 항목. 「점말 유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문화재청·HeritageWiki, 「제천 의림지와 제림」「제천 점말동굴 유적」. 김현길, 『충주댐 수몰 마을사』(제천편, 2001).

숫자가 자료마다 1~2년, 한 달씩 어긋나는 대목은 본문에 적어 두었다. 더 캐고 싶은 대목이 있으면 그 시기의 시정백서 해당 편을 시 기획부서에서 대조하는 편이 정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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