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쓰는 편지

원우에게

2026년 겨울, 아빠가 적어두는 말들 — 언젠가 네가 읽을 날을 기다리며

원우야, 아빠가 지난 주말에 자전거로 청풍호 한 바퀴 돌고 왔거든. 왕복 50킬로 남짓. 페달 밟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 "이거 뭐하러 하고 있지?" 어차피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올 건데. 힘들게 언덕 올라가서 내려오면 결국 아침에 서 있던 그 자리인데. 근데 이상하게 그러면서도 계속 밟고 있더라. 힘들어 죽겠는데 안 멈춰. 집 와서 샤워하고 누우니까 그게 좀 웃겼어. 아무 의미 없는 짓을 종일 하고 왔는데 왜 이렇게 개운하지, 하고... 살다 보면 그런 순간이 자주 와. 왜 학교 가야 하지, 왜 공부해야 하지, 왜 이걸 참아야 하지. 정답이 없어. 원우가 아무리 머리 굴려도 어른들도 그 답은 몰라. 근데 답이 없다고 안 하는 게 아니거든. 하고 있으면 이상하게 그 안에서 뭔가 생겨나. 아빠가 페달 밟으면서 느꼈던 그 개운함처럼. 원우도 답이 안 보일 때 너무 무겁게 짊어지진 마. 그냥 오늘 하루를 살아내는 게 답일 때가 더 많아.
원우야, 크고 작은 갈림길 앞에서 선택하고 결정하는 과정의 반복이 인생이겠지... 선택하는 그 순간이 중요한 게 아니라, 매일매일 그 길을 다시 고르는 사람이 잘 살더라고. "그때 다른 데로 갈걸" 하고 뒤돌아보는 대신 오늘 하루를 잘 살아내는 사람. 원우도 앞으로 수 많은 갈림길 앞에 자주 서게 될 거야. 무섭다고 미루지만 마. 안 고르는 것도 결국 고른 거거든... 일단 바른생각으로 결정하고 선택했으면 그 결과는 나쁘지 않을테니...
원우야, 요즘 인스타나 유튜브 보면 다들 뭔가 대단해 보이지? 비싼 옷, 좋은 신발,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것들. 아빠도 어릴 때 그런 게 참 부러웠어. 남들 눈에 어떻게 비칠까가 제일 중요했거든. 그런데 살아보니까 알겠더라. 남들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마음이 커질수록 정작 나 자신은 점점 작아지더라고. 남의 시선으로 채운 자신감은 그 시선이 사라지는 순간 함께 무너져. 반면 진짜 자신감은 조용해.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내가 나를 알고 있으니까. 아빠가 하고 싶은 말은 — 남들에게 인정받으려 애쓰는 시간보다, 스스로 조금씩 나아지는 시간을 더 아끼라는 거야. 어제보다 오늘 한 문제 더 풀 줄 아는 나, 어제보다 오늘 한 뼘 더 참을 줄 아는 나. 그렇게 쌓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 남의 시선이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게 돼. 원우가 겉모습보다 속이 단단한 사람으로 커가길 바라. 아빠는 언제나 네 편이야.
원우야, 요즘 배드민턴 레슨 가서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니 참 대견해...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하는 모습... 근데 아빠가 살면서 눈여겨 본 게 하나 있어. 뭐든 처음엔 다들 재미로 시작해. 그러다 어느 순간 재미가 사라지는 지점이 와. 대부분 거기서 그만둬. 근데 이상하게도 진짜 실력이 붙는 건 재미 없어진 그 이후부터더라. 원우가 지금 서 있는 데가 딱 그 지점 같아. 잘 안 되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 잘 안 되는 시간을 어떻게 지내느냐가 나중을 결정하는 거야. 나무도 뿌리가 깊어지는 동안은 위로는 안 자란다잖아. 지치면 조금 쉬어도 돼. 다만 그만두지만 마. 최고가 될 필요는 없어 최선만 다 해보자...
원우야, 아빠 머릿속에는 요즘 두 명이 사는 것 같아. 하나는 "일찍 자야지, 내일 출근해야 하잖아"라고 말하는 아빠. 다른 하나는 "릴스 한 편만 더 보자, 재밌잖아"라고 말하는 아빠. 솔직히 그 두 명 중에 자주 지는 건 조용한 쪽이야. 그러고 다음날 후회하지. 어른 되어도 똑같이 이래... 부끄럽지만 사실이야. 근데 인생이 잘 풀리는 사람 보면, 참고 먼저 해야 할 걸 하는 쪽이 더 성공하더라고. 재미없어 보여도 결국 그런 사람이 더 자유롭게 살아. 원우한텐 그 힘이 조금씩 자라고 있는 것 같아. 아빠보단 낫다 싶어서 부럽기도 하고.
원우야, 아빠 20대 때 얘기 하나 해줄까. 그때 아빠는 옷 하나 사는 것도 며칠을 고민했어. 남들이 촌스럽다고 하면 어쩌지, 이상하다고 하면 어쩌지.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그땐 진짜 그게 큰일이었어. 40대 넘어가면서 어느 순간 알겠더라. 남들은 아빠한테 그렇게 관심 없어. 다들 자기 인생 사느라 바쁘거든. 며칠 고민한 옷도 남 눈엔 그냥 지나가는 옷이야. 이걸 30년 살고 나서야 알았어. 그동안 남 눈치 보느라 놓친 시간들이 좀 아까워. 원우는 좀 일찍 알았으면 해. 남들이 뭐라 하든, 원우가 정말 좋다고 생각하는 걸 해. 남들 시선은 어차피 오래 안 가.
원우야, 우리 아기 원우가 언제 이렇게 컸나 싶다. 잘 크고 있어~!!
원우야, 살다 보면 머릿속이 시끄러워질 때가 많잖아. 걱정, 계산, 남과의 비교, 자기 검열. 근데 좋은 음악 앞에 있으면 그런 생각을 전환할 수 있지. 아빠는 그게 참 신기해. 사실 그런 순간들이 우리를 지키는 것 같아. 원우도 나중에 마음이 시끄러워지면 좋은 음악을 들으며 잠깐 있어봐. 의외로 그게 답이 될 때가 있어.
원우야, 세상엔 잘난 사람도 많고 강한 사람도 많아. 근데 정작 옆에 두고 오래 만나고 싶은 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 남의 아픔을 자기 것처럼 느낄 줄 아는 사람이더라. 원우가 일전에 친구 얘기 하면서 마음 아파했잖아. 그거 이미 원우한테 있는 거야. 잊지 말고, 없애지 말고 조심히 지켜. 아빠는 원우가 강한 사람보다 따뜻한 사람이 됐으면 좋겠어. 그게 훨씬 어려운 일이거든.
원우야, 지나고 보면 그런 순간들이 제일 아까워.
원우야, 아빠가 요즘 이상한 걸 하나 눈치챘어. 뭔가 사고 싶다고 며칠 노래를 부르다가, 막상 사고 나면 일주일도 안 돼서 시들해지는 거야. 근데 또 다른 걸 사고 싶어지고. 이 반복이 참 우스워. 살면서 배운 게 하나 있다면 — 원한다는 감정 자체를 좀 의심하게 되는 거야. 진짜 내가 원하는 건지, 그냥 뭔가에 홀린 건지. 광고 때문인지, 남들이 다 갖고 있어서인지. 원우도 뭔가 갖고 싶을 때 잠깐 멈춰서 물어봐. "이거 진짜 내가 원하는 건가?" 그 질문 하나로 인생이 훨씬 가벼워지더라. 아빠도 아직 잘 안 되는데... 원우가 조금은 나았으면 좋겠어.
원우야, 우리는 뭐가 그렇게 필요해서 자꾸 뭘 사고, 자꾸 뭘 바꾸는지 몰라. 새 폰 나오면 사야 할 것 같고, 남들 다 있으면 나도 있어야 할 것 같고. 그러다 보면 지갑은 얇아지는데 마음은 여전히 허전해. 할머니는 지금 갖고 있는 것에 감사하며 살고 계신 것 같아. 아빠는 그게 진짜 부자라는 생각이 들더라. 원우도 언젠간 알게 될 거야. 뭘 얼마나 갖고 있느냐보다, 지금 것에 만족할 줄 아는 게 훨씬 중요하다는 거.
원우야, 원우도 살면서 결정할 게 점점 많아질 거야. 결정하고 후회할 일도 많을 거고. 근데 후회를 하더라도 남 탓은 하지 말길... 원우는 조금 일찍 알았으면 해서.
원우야, 남을 이겨서 얻는 만족은 오래 안 가. 어제의 나보다 조금 나아진 오늘의 나, 그 만족이 훨씬 길게 가더라.
원우야, 오랜 친구나 지인들을 잊고 사는 게 나쁜 건 아닌데, 가끔은 기억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아. 시간이 무한하지 않다는 거. 그 생각이 들 때마다 아빠는 원우 얼굴이 자꾸 떠올라. 다음에 하지 말고 오늘 좋아한다고 말해야지, 다음에 말고 오늘 같이 밥 먹어야지. 그런 마음이 들어. 그냥 아빠가 원우 사랑한다는 얘기라고 생각해줘.
원우야, 아빠는 요즘 옛날 노래를 다시 듣기 시작했어. 20대 때 그렇게 좋아했던 노래들인데 그때 듣던 거랑 지금 듣는 게 다른 노래 같아. 가사가 다르게 들려. 마음 붙일 노래 하나쯤은 있었으면 좋겠어. 원우한텐 요즘 뭐가 그런 노래일까. 다음에 하나 들려줘.
원우야,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지만 말고 게임좀 적당히 해라~!!
원우야, 아빠는 요즘 어깨가 자꾸 아프네. 손을 뒤로 돌리면 뚝뚝 소리도 나고. 그럴 때마다 젊었을 때 좀 챙길 걸 그랬다는 후회가 들어. 건강이라는 거 있잖아. 있을 땐 진짜 모르겠더라. 아빠도 젊었을땐 술을 매일 마시고 출근하고 그랬거든. 근데 40 넘어가면서 하나씩 신호가 와. 늦게 잔 다음날은 하루종일 멍하고, 인스턴트 자주 먹으면 속이 더부룩하고. 원우한텐 지금이 제일 튼튼할 때야. 그 튼튼함이 평생 갈 줄 알겠지만... 아빠도 그렇게 생각했었어. 잔소리 같겠지만 — 오래 앉아있지만 말고, 밤에 일찍 자고, 운동을 멈추지 말길... 아빠처럼 후회하지 말고.
원우야, "지금 알고 있는 것들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 이 말이 요즘 자꾸 머릿속에 맴돌아. 뭐든지 때가 있다는 말이 있지. 학창 시절엔 공부를 해야 하는 때야. 그 시간에 공부 대신 다른 걸 하게 되면 배움이 뒤처지게 돼. 배움이 게을러진다는 건 그 시기를 충실히 살지 않는다는 말이고, 그게 쌓이면 나중에 삶의 선택지가 좁아지는 거야. 우리나라 같이 작은 나라에서는 아직도 학연, 지연, 혈연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일이 많아. 그게 옳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현실이 그렇거든. 원우가 살아갈 시대에도 최소한 그 흔적은 남아있을 거야. 노파심에 또 잔소리를 하게 되는데 — 나중에 원우 너도 아들이 생기면 이 마음을 알게 될 거야. 아빠는 원우 네가 범죄가 아닌 이상 무슨 일을 하든, 어떤 일을 하든 이해할 수 있어. 그냥 마음이 다칠까 봐 걱정이야. 아빠보다 훨씬 잘 살겠지만. 보다 많은 결핍이 필요한 시기인데... 미안할 따름이구나.
원우야, 한참 지났네. 우리 아들이 중학교에 입학했어. 점점 든든한 남자가 되어가는 느낌이야. 지금 잘 먹으면 키가 엄청 클 텐데 그것도 모르고 안 먹으려고만 하니 참... 말을 해도 듣고 싶은 말만 듣는 중딩이 됐구나. 나중에 다 알게 되겠지만 "지금 알고 있는 것들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하는 후회들을 원우는 조금이라도 덜 겪었으면 좋겠어. 아빠는 요즘 인생의 변곡점에 있는 느낌이야. 46년을 살아왔는데 변곡점이라니, 새삼스럽지? 그동안의 삶을 돌아보며 요즘 이런 생각이 들어서 짧게 적어봤어. 알콜과 담배는 소중한 내 몸을 좀먹고 있었고 리더십과 추진력은 무례함과 싸가지가 되어버리고 유머와 센스는 유치한 싸구려가 되어버리고 변화하길 바랐지만 변화라니 언감생심 허세와 아는 척에 우쭐되곤 했었지만 사람들이 무섭다네 이제야 느끼지만 돌이키긴 늦었다네 할 말 없네... 그래도 아들 원우야 잘 하리라 믿어...
원우야, 오늘 나태주 시인의 에세이를 읽었어. '너를 아끼며 살아라'라는 시가 담긴 책인데 — 문득 한꺼번에 다보기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어. 좋은 글이 가득한 책인데 마음에 담고 싶은 시와 문장이 한가득이야. 근데 아빠는 나이 들수록 글을 읽을 때 같은 부분을 몇 번씩 다시 보게 되는 경우가 많아. 잡념이 가득해서 글을 읽는 중에도 딴생각이 끼어들고, 그 순간을 놓치는 거야. 참 한심한 일이지. 원우가 아빠를 많이 닮은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 그렇다면 — 원우야, 아빠가 이 나이에 느끼는 것들을 너는 훨씬 젊을 때 알아채길 바라. 좋은 글은 빨리 읽을수록 좋아. 아직 20대, 30대가 남아있는 너가 아빠는 참 부럽다.
원우야, 오늘 중학교 반편성 평가시험이 있는 날이라 간밤에 제법 공부를 하더라. 그동안 게임을 하도 많이 해서 집중력이 걱정되긴 했는데 — 나름 짧게나마 문제도 풀고 답도 맞춰보는 모습을 보니 많이 컸구나 싶었어. 그래도 걱정스러운 마음은 언제나 있어. 너도 나중에 아들이 생기면 알게 될 거야. 늘 불안하고 걱정되는 그 마음. 차 조심, 개 조심, 사람 조심해야 한다는 마음을 지금의 너는 모르겠지. 히로시마 가서 스끼야끼 많이 먹자~ 기다려!
원우야, 설 지나고 며칠이 됐네. 이번에 새뱃돈을 80만원이나 받더라. 아빠가 기억하는 1995년 고등학교 1학년 때 새뱃돈은 10만원이었어. 그때 그 돈으로 TV수신카드를 사서 데스크탑 컴퓨터에 달았던 기억이 생생해. 지금과 비교하면 참 많이 바뀌었지. 그리고 어제는 세상이 참 어수선한 소식이 들렸어. 2024년 12월 비상계엄을 선포했던 대통령이 1심 재판에서 무기징역을 받았대. 원우야, 아직 정치가 뭔지 다 알기는 어렵겠지만 — 세상은 결국 원칙대로 돌아간다는 것, 그걸 기억해. 높은 자리에 있다고 해서 잘못이 없어지는 건 아니야. 아빠는 살아오면서 비교적 운이 좋았던 것 같아. 그 운에 감사하며 살고 있어. 원우도 운이 따라주는 삶이길 바라지만 — 운을 기다리기보다는 운이 따라올 만한 사람이 되는 게 먼저가 이닐까....
원우야, 설 연휴에 친인척들과의 자리를 잘 따라다니더라. 불편하긴 해도 — 사실 용돈을 받을 수도 있다는 기대가 있어서겠지? 아빠는 그것도 귀여워. 돈을 받으면 뭘 사고 싶은 거야? 요즘 원우가 금전과 물건에 대한 욕구가 많은 것 같아서 나중에 어떤 욕구들이 자랄지 궁금하기도 해. 욕심에 대해서 아빠 생각을 말해줄게. 흔히들 욕심은 끝이 없다고 하지. 또 욕심이 화를 부른다고도 하고. 맞는 말이야. 근데 욕심이 무조건 나쁜 건 아니야. 적정선을 지키는 게 핵심이거든. 더 잘 살고 싶은 욕심, 더 배우고 싶은 욕심,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욕심 — 이런 건 좋은 원동력이 돼. 반면 남보다 더 갖고 싶은 욕심, 비교에서 오는 욕심은 오히려 나를 갉아먹어. 욕심의 방향이 중요해. 갖고 싶은 마음보다 이루고 싶은 마음을 키워가렴.
원우야, 잠깐 짬을 내서 김밥을 배달해줬어. 요즘 한창 잘 먹는 것 같아서 — 키도 덩치도 커지려는 것 같아서 뭐라도 자꾸 먹여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소고기 안심으로 스테이크도 해줘야 하는데. 기타 얘기 좀 하자. 주 2회씩 열심히 다니고 있는데, 아빠 생각엔 연습을 조금 더 하고 가면 좋을 것 같긴 해. 아빠 욕심이겠지? 근데 이번에 기타를 배우면서 느낀 게 있어. 처음엔 하기 싫고 어색하고 손가락도 아프고. 그게 아주 잠시더라는 거야. 일단 시작하고 적응되고 나면 — 뭔가를 배운다는 뿌듯함, 미지의 세계에 발을 디디는 설렘이 생기거든. 이걸 계기로 원우가 앞으로 어떤 일을 만나도 새로운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없었으면 해. 처음 해보는 게 두렵고 어색한 건 당연한 거야. 그걸 알면서도 시작하는 용기가 중요한 거거든.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심어주기가 참 어렵다는 걸 아빠도 알아. 그래도 이 한 가지만은 네 마음에 남았으면 해 — 어색하지만 해보는 쪽이 훨씬 많은 걸 남긴다는 것.
원우야, 아빠 어린 시절 얘기를 좀 해줄게. 초등학교 3~5학년 무렵이었는데, 그때 한창 유행하던 오락실을 가다 할아버지한테 들킨 거야. 자주 가던 곳인데 그날은 유독 심하게 혼났어. 발가벗고 길가에서 울부짖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어. 지금 기준으로 보면 그 시절 인권이라는 게 참... 살던 곳은 의림동 8-32번지. 폭이 1미터도 안 되는 좁은 골목을 15미터쯤 들어가면 나오는 방 두 칸짜리 공간이었어. 화장실은 30미터를 걸어나가야 나오는 공용 좌식 변기였고. 그 안에서 살았어. 매 학기 초 가정환경 조사 시간이 제일 싫었어. 집이, 부모님 직업이, 동네가 부끄러워서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고 어떻게 둘러대야 할지 고민했던 그 시간들. 지금도 생생해. 이제 생각해보면 — 그 어릴 적 결핍과 부끄러움이, 나중에 아빠가 허세를 부리게 된 이유였던 것 같아. 실제론 부족한 것 같은 나를 감추기 위해 더 있어 보이고 싶었던 거지. 근데 어떤 경우에도 허세와 과시는 불필요해. 실제로 다른 사람들은 나에게 생각보다 관심이 없거든. 남의 눈을 의식하는 데 에너지를 쓰지 말고 내면을 키우는 데 써. 사람의 진면목은 외적인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쌓인 말투, 습관, 주변 사람들에서 보이거든. 원우야, 너는 아빠가 힘들게 자라던 1도 경험시키고 싶지 않아. 그러나 결핍이 사람을 단단하게 만든다는 건 진리인 것 같더라.
원우야, 방학 중인 원우가 나름 시간을 잘 보내고 있는 것 같아서 참 대견해. 걸어서 기타도 다녀오고, 주짓수에 학원까지, 배드민턴도 하고. 몸을 만져보니 점점 딱딱해지는 남성이 되어가고 있어. 영어일기도 점점 능숙하게 잘 써나가고 있고. 아빠는 요즘 술과 담배를 끊고 나서 눈에 띄게 많은 변화를 체감하고 있어. 자다가 깨는 일도 줄었고, 아침이 한결 가벼워졌거든. 성인이 된 후 시작한 술담배를 그동안 끊지 못하다가 이번에 끊게 되어 정말 다행이야. 그동안 들인 시간과 돈을 생각하면 참 아깝지만, 지금이라도 끊었으니. 나중에 원우도 성인이 되면 술담배를 접할 기회가 많이 생길 거야. 특히 담배는 한번 시작하면 끊는 비율이 10%도 안 돼. 그만큼 중독성이 강하거든. 거절할 수 있는 용기, 미리 길러두길 바라. 누구보다 피부도 좋고 깔끔한 원우가 술담배로 더럽혀지는 건 생각하기도 싫어. 오늘도 잘 먹고 잘 자고 행복하게~
원우야, 원우 명의로 사놓은 미국 주식이 요즘 많이 흔들리고 있어. 노보노르디스크가 쑥 떨어지더니 플러스였던 것들이 마이너스가 되고, 마이너스였던 게 플러스로 돌아오고... 참 인간사 같더라고. 계속 바뀌고 변하고. 그래도 버티는 사람이 이긴다는 말, 아빠는 진심으로 믿어. 나중에 이기는 사람이 진짜 이기는 거야. 주식도, 공부도, 사람 관계도 결국 버티는 힘이 관건이야. 그리고 어제 친했던 형님이 갑자기 돌아가셨어. 씁쓸하다. 건강하게 사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느끼게 되는 날이었어. 원우야, 이렇게 건강하고 훌륭한 네가 술담배 같은 거 손도 대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원우야, 며칠 글을 안 썼더니 고새 게을러졌네. 생각해보니 그동안 술 때문에 뭘 자꾸 잊고 흐지부지됐던 게 이런 글 쓰는 것도 포함이었던 것 같아. 일기도 메모도 지갑 관리도 — 며칠 하다가 잊어버리고, 흐지부지되던 일들이 참 많았거든. 사실 술이 꼭 나쁜 것만 있는 건 아니야. 힘들고 나빴던 일들을 빠르게 지워주고 다시 시작하게 해주는 힘이 있거든. 행복한 일을 축하할 때만 마시면 그 기억이 오래가는 좋은 수단이 되기도 해. 근데 담배는 달라. 단 한 가지도 긍정적인 게 없어. 그게 두 가지의 결정적인 차이야. 아빠 얘기 하나 더 하자면 — 아빠는 아세트알데히드가 부족한 체질이래. 쉽게 말하면 술을 마시면 얼굴이 빨게지는 사람, 몸이 술을 독약처럼 받아들이는 사람이야. 그걸 알면서도 이제야 끊었다는 게 참 안타깝고 아쉽지. 원우야, 아빠처럼 늦게 알지 말고 빨리 배워. 그게 아빠의 바람이야.
최원우님~!! 매일매일 어찌 그리 하기 싫어하시고 하고싶은것만 하려고 하실까요? 당연한 일이겠지요? 눈 뜨면 인스타와 카톡으로 하루를 시작하시고~ 게임 좀 하다가 PC게임도 좀 하시고~ 학원 갔다 오고 나면 다시 인스타 모드에 식사까지!! 밤 늦게까지 이것저것 TV보고 인스타 하다가 밀린 숙제 아주 잠깐~ 하고나면 하루가 끝!! 참으로 알차고도 바쁜 하루일과이시군요. 그 나이에는 그런 것들이 정상이겠지?? 아빠도 그랬을 테니까. 그렇지만 원우야, 그 안에서 딱 한 가지만 더 추가해줄 수 없어? 책 한 페이지, 영어 단어 열 개, 줄넘기 오 분. 뭐든 좋아. 매일 조금씩 쌓이는 게 나중에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내. 지금 당장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도. 잘생기고 개구진 내 아들 — 장차 너의 장래가 걱정되지만... 그래도 행복하게 살길 바랄뿐이야~ ㅅㄹㅎ~~
원우야, 냉동밥 먹기 싫다고 햇반 사달라는 거... 귀엽긴 한데 아빠는 그 말을 들으면서 좀 복잡한 마음이 들었어. 사실 미안하기도 해. 방학인데 맛있는 거 해줄 여건이 안 된다는 게. 부지런히 차려줬어야 하는데 아빠도 바쁘고 피곤한 날이 있거든. 그래서 미안해. 근데 동시에 답답하기도 한 거 사실이야. 방학에 해야 할 일들이 있잖아. 공부든 운동이든 뭔가를 채워야 하는 시간인데, 방에서 게임하고 SNS 보다가 밥 먹고 또 그러고... 그러다 방학이 끝나있어. 한창 게임과 인스타에만 몰두하고 있는 너를 보면 이게 괜찮은 건지 걱정이 돼. 요즘 아빠의 최대 걱정이라고 할 수 있어. 물론 알아. 그 나이에 게임하고 친구들이랑 연락하고 싶은 거. 그게 이상한 게 아니야. 근데 그것만 하기엔 네가 가진 가능성이 너무 아깝다는 거야. 아빠 눈엔 그게 보이거든. 잔소리 같지? 맞아, 잔소리야. 그래도 적는 건 네가 잘 됐으면 해서야.
원우야, 아빠 대학 시절 얘기를 좀 해줄게. 1998년이야. 지금 생각하면 아찔할 정도로 위험한 행동들을 많이 했어... 술 담배와 폭음까지. 그때는 왜 그리 선배들이 무섭고, 술 마시라고 하면 왜 그렇게 거절을 못 했는지. 분위기에 휩쓸리고, 또래들한테 뒤처지는 것 같은 게 두려웠던 것 같아. 그러면서 정작 내가 해야 하는 공부, 내가 진짜 원하는 것들은 뒷전이었지. 그때 그 에너지를 나를 위해 썼더라면 어땠을까 싶어. 남들 눈치 보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공부 열심히 하고, 좋아하는 일 찾는 데 시간을 더 썼다면... 그리고 이게 진짜 중요한 얘긴데 — 잘 나갈 땐 남의 말을 듣지 않아. 소위 잘나가고 있다고 생각할 때, 승승장구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을때는 누가 뭐라 해도 귀에 잘 안 들어와. 거만함이 귀를 막거든. 거만함이 꺾이기 시작해서야 들으려 하지. 아빠도 그랬어. 그러니까 원우야, 잘 될 때 일수록 더 귀를 열어두어야 해. 그게 진짜 어른의 태도야. 아빠가 늦게 배운 걸 네가 먼저 알았으면 해서 적는 거야.
원우야, 어제는 경주월드를 댕겨왔지... 솔직히 말하면 허벅지를 꼬집어가며 운전했어. 편도만 해도 만만치 않은 거리인데 졸음이 쏟아지는 걸 억지로 버티면서 갔지. 그래도 갔어. 네가 즐거울 테니까. 친구들이랑 해맑게 노는 너를 옆에서 보니까 그것만으로도 피로가 풀리는 것 같았어. 까르르 웃고 뛰어다니는 모습이 그냥 좋더라고. 아빠가 힘들게 운전해서 데려온 보람이 있는 거지. 그런데 밥은 왜 그렇게 안 먹는 거야? 이것저것 사줬는데 조금 먹고 돌아다니기만 하고... 한창 클 때 잘 먹어야 하는데. 그게 제일 아쉬웠어. 그리고 여자친구 얘기. 아빠한테 숨기는 거 뭐라 하려는 게 아니야. 그 나이에 그럴 수 있어. 근데 아빠가 본 건, 숨기는 게 아니라 아빠 눈치를 보면서 살짝 딴청 피우는 네 모습이었어. 그 모습이 웃기기도 하고, 아 이 녀석이 이제 이런 것도 생기는구나 싶어서 묘한 기분이 들기도 했지. 숨기는 건 나쁜 게 아니야. 다 말할 필요도 없어. 그런데 거짓말은 달라. 나중에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거든. 사람 사이에서 신뢰를 잃으면 그걸 다시 쌓는 데 배로 걸려. 그것만 기억해줘.
I went to Gyeongju World with you yesterday. It's a long way off. I managed to come here by hitting my thighs while I was drowsy. When I saw you playing innocent with your friends, it wasn't hard at all. But when I saw you don't eat well, play around, and hide about your girlfriend from your dad, I thought — you grew up a little now. It's not bad to hide. But lying is a bad thing. It can come back as a boomerang, late.
원우야, 방학 중 내준 영어일기 과제를 아주 훌륭하게 잘 수행하고 있어... 아빠가 코멘트 달아주는 게 더 오래걸릴 정도라니까. 번거롭긴 해도 솔직히 재미있어. 네 영어 문장들을 읽으면서 아, 이 녀석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구나 싶은 거야. 그게 아빠한테는 선물 같은 거야. 잘하고 있어 ^^ 요즘 아빠가 이런 고민을 하고 있어... 언젠가 이해하겠지만 적어두는 거야.
"베풂은 선택일 때 가장 건강하고, 그 선택이 반복될수록 삶도 더 단단해진다."
안 해도 되는데 내가 하기로 결정한 것, 손해를 알고도 감수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이 행동이 내 가치와 방향과 맞는 것 — 그게 선택으로서의 베풂이야. 그렇게 한 일은 힘들어도 후회가 없어. "내가 선택한 일이야"라는 주도감이 남거든. 그리고 선을 존중하는 사람은 곁에 남고, 계속 이용하려는 관계는 자연스럽게 멀어져. 처음엔 인간관계가 줄어드는 것 같아도 결국 편해지는 거야. 베풂은 날 소모시키는 일이 아니라, 나를 드러내는 선택이야. 그 기준을 일찍 세울수록 삶이 단단해지거든. 아빠보다 훨씬 일찍 알았으면 해서 적어뒀어.
원우야, 정말 뛰어나게 잘 하는 우리 아들인데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나 어떤 고정관념이 있는지... 이것저것 다 알려주고 싶은 아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싫다고만 할때는 참... 뭘 권하면 "싫어", 뭘 같이 해보자 하면 "별로야" — 아빠는 그 말이 나올 때마다 서운하다기 보다는 좀 답답해. 네가 아직 몰라서 그런 거거든. 해보기 전에는 재미있는지 없는지를 알 수가 없잖아. 아빠가 운동 종목을 하나씩 배운 건 다 그렇게 시작했어. 누군가 권해서, 한번 해봤더니 재미있어서. 그러다 어느 순간 그게 내 것이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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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또한 사람을 만나는 언어야. 같이 운동하고 땀 흘리다 보면 말 한마디 안 해도 친해지는 게 있거든. 이런 것들도 생각보다 엄청 중요해. 영어는 기본이고 그리고 넌 공부도 잘 할거야!! 화이팅 어려서부터 원우 너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끝까지 잘 들어주는 경청의 자세가 있었고... 묻는말에 항상 생각을 하고 답하는 신중한 성격이었어... 그건 정말 타고난 듯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간단한 질문에도 "음..."하며 생각하고 답하는 모습이 참 신기하고 귀여웠지... 아빠는 그 모습이 정말 좋았어. 세상에 말 빠른 사람은 많아. 그런데 들을 줄 아는 사람,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적기도 하거든. 그게 무기야. 커가면서도 절대 잃지 마.
원우야, 오늘 네가 혼자 제천역까지 걸어가서 기차를 타고 원주에 다녀왔다는 게 아빠는 사실 하루 종일 마음에 걸렸어. 별일 없겠지 싶으면서도 자꾸 생각이 가더라고. 원주 시내버스는 제대로 탔는지, 중앙시장에서 길을 잃진 않았는지, 고모할머니댁에서 밥은 잘 먹었는지... 그런데 아무 연락 없이 저녁에 돌아온 네 모습을 보니까, 그냥 많이 컸구나 싶었어. 걱정했던 게 무색할 만큼. 초딩을 갓 졸업한 아이가 제천역에서 기차 타고, 시내버스 갈아타고, 저녁 먹고 돌아오는 거 — 사실 별것 아닌 것 같아도 그게 처음 해보는 일이잖아. 그 경험이 쌓여야 세상을 혼자 헤쳐나갈 수 있는 힘이 생기거든. 아빠가 뭘 가르쳐줬다기보다, 네가 스스로 해낸 거야. 그러면서 아빠가 한 가지 꼭 말해주고 싶은 게 있어. 젊은 혈기에 순간적인 생각과 행동이 널 망가트릴 수 있어... 특히 남자들은 그래. 그 나이에는 뭐든 빠르고 강하고 지고 싶지 않은 마음이 앞서거든. 그게 에너지가 되기도 하지만, 방향이 잘못되면 가장 큰 실수를 만들어내기도 해. 그러나 반대로 젊은 나이에 신중하고 진지한 자세는 모든 사람이 좋아하기도 하지. 말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하고, 행동하기 전에 결과를 그려보는 습관. 그게 어렵지 않아 보여도 평생 지키기 쉽지 않은 덕목이야. 주위의 사람들과 호기심 어린 들뜬 마음은 잠시 접고 밝고 씩씩하며 진중한 습관은 널 반드시 올바르고 바람직한 길로 인도할거야. 아빠가 보증하마!! 그리고 하나 더 — 다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할때는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도 험담보다는 무언이 무언보다는 장점을 칭찬하는 편이 좋아!! 그 사람이 없는 자리에서 그 사람을 어떻게 말하는지가 결국 네 인격을 보여주거든. 험담하는 입으로는 좋은 말이 나오기 어렵고, 칭찬하는 습관이 있는 사람 주변엔 사람이 모이는 법. 아빠가 살아보니 진짜 그렇더라. 많이 컸고 대견하네 우리 아들...

제천에서, 아빠가

최 승 환

소개 칼럼 노트 원우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