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럼 목록
삶의 기록

아버지와 나 그리고 아들

2026-06-17 에세이가족

아버지와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눠본 기억이 별로 없다.

어릴 때 아버지는 나에게 늘 무섭고 두려운 사람이었다. 술 드신 날이면 온 집 안의 공기가 달라졌고, 우리는 눈치를 봤다. 자는 척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고,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는 불똥을 맞거나 밤새 잠을 못 자는 날도 있었다. 그 시절 나는 이불 속에서 조용히 각오를 다졌다. 아버지처럼 술 마시지 않겠다고. (요즘 아버지는 술을 거의 드시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의 나에게는 그 반발심이 적잖이 기여했다.

그런데 나이가 들고 술도 마시고 아이들이 커가다 보니 조금씩 아버지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고등학교 시절 할아버지, 할머니가 모두 돌아가시고 두 고모를 건사하며 이른 나이에 가정을 꾸렸다. 젊은 나이에 실컷 놀아보지도 못한 채 가장의 무게를 짊어졌다. 답답한 것들은 쌓였고, 하소연할 곳은 없었고, 술기운을 빌려야 겨우 말이 나왔던 밤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걸 이해한다고 말하기는 아직도 어렵다. 다만 이제는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겠다' 정도는 헤아려진다.

올해 어버이날을 앞두고 아버지께 편지를 썼다. 처음엔 감사하다는 말만 쓰려 했는데, 쓰다 보니 솔직한 말들이 먼저 나왔다. 무서웠다고.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각오했다고. 그리고 그 각오마저도 결국 아버지가 준 것이었다고.

삶은 설명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이어진다. 상처가 각오가 되고, 각오가 습관이 되고, 습관이 결국 다음 세대에게 무언가를 넘긴다. 좋은 것만 넘기고 싶지만, 사람이 그렇게 깔끔하게 살아지지는 않는다.

나중에 후회하기 전에 일단 자주 만나야겠다. 밥 한 끼 먹고, 볼링 한 게임 치고, 사진 한 장 찍는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말이 없어도, 서로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도, 그냥 옆에 있었다는 사실이 나중에 무언가가 된다. 아버지 옆에 있던 내가 그랬던 것처럼.

🏠 홈 소개 연구 칼럼 제천